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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비하우스 펜션 주변 여행지Tourist Sp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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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다보탑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0.4m, 기단 폭 4.4m이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의 석가탑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탑으로, 전형적인 쌍탑가람의 배치이다. 두 탑을 현재와 같이 동서로 나란히 세운 까닭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기단부에는 사방에 보계를 마련하였고, 보계에는 난간을 가설하였던 석주가 남아 있다. (자료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 korean.visitkore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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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석가탑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마주서 있는 석탑 가운데 서탑으로 국보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탑(釋迦塔) 또는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하는데, 석가탑은 동탑인 다보탑(多寶塔)에 대칭되는 호칭이다. 이러한 호칭은 『법화경』에 이른바 다보여래(多寶如來)와 석가여래(釋迦如來)가 나란히 앉아 하나는 설법하고 하나는 증명하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의 탑이요, 석가탑은 곧 석가여래상주설법(釋迦如來常住說法)의 탑이다. 그러나 이 탑에서 나온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佛國寺無垢淨光塔重修記)」는 1024년(현종 15)에 불국사 무구정광탑을 중수하면서 남긴 기록인데, 1038년(정종 4)에 다시 옮겨 적은 것으로, 이 탑(혹은 다보탑)을 무구정광탑으로 지칭하고 있어 고려시대에는 불국사의 두 탑이 석가탑이나 다보탑으로 불려지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불국사고금역대기』에 의해서 석가탑 창건을 751년으로 보았으나, 묵서지편에서 나온 두 종류의 중수기 기록으로 다보탑과 석가탑 모두 대성각간(大城角干)의 주도하에 불국사 쌍탑으로 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창건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자료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 korean.visitkore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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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교,칠보교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연화교 높이 2.31m·너비 1.48m, 칠보교 높이 4.06m·너비 1.6m이다. 불국사 앞, 대석단(大石壇) 동쪽의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맞은편 서쪽에 있다. 가구(架構) 수법은 동쪽의 청운교·백운교와 거의 비슷하다. 밑에 있는 연화교는 10단의 층계에 계단식 등형(登桁 )을 만들어 양분하였고, 양쪽 끝의 등형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석주(石柱)만 남아 있다. 다리 아래는 호형(弧形)으로 가공한 석재를 사용하여 궁륭형(穹窿 形) 통로를 만들었으며, 이 석계(石階)에서 특이한 것은 각 계층에 미려한 연판(蓮瓣)이 양각되어 있는 점이다.
칠보교는 8단의 보계(寶階)로 이루어졌고 한 장의 장석(長石)으로 된 등형으로 양분된 점은 연화교와 다르나, 석주가 남아 있어 석난(石欄) 설치의 흔적을 남긴 점은 같은 형식이다. 다만 규모가 작아진 관계로 다리 아래 통로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보계에 특별한 조식(彫飾)도 없다. 칠보교를 올라서면 안양문(安養門)을 지나 극락전을 대하게 되는데, 이 석계는 동석계(東石階)의 장엄함에 비해 우미수려하여 조화와 변화를 주고 있다. 이 석계 또한 동석계와 마찬가지로 경덕왕(景德王) 때 김대성(金大城) 중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 korean.visitkorea.or.kr) -
석굴암
석굴암은 경주시 토함산 정상 가까이에 자리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굴 사원이다. 화강암을 이용해 만든 인공석굴로,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한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통일신라 혜공왕 10년에 완성된 석굴암은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 불렀다. 신라의 귀족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석굴암은 사실적인 표현과 원숙한 조각 기법이 돋보이며, 내부공간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보살상, 제자상 등 총 38구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석굴암 석굴은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종합적인 결정체이다. 1천 년의 역사를 지닌 석굴암의 자연 친화적인 온, 습도 조절 비결을 현대 과학기술로 아직 풀지 못할 정도로 신비롭다. 현재 항온, 항습의 문제가 우려되어 1976년부터 유리벽을 통한 외부관람만 가능하다. 석굴암에 가려면 주차장에 차를 두고, 고즈넉한 산길을 따라 20여분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수풀이 우거진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걷기에 좋다. 특히 석굴암 해돋이는 장관으로 소문이 나 있다. (자료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 korean.visitkorea.or.kr) -
경주월드
경주월드는 남부권 최대 테마파크로 국내 최강 스릴을 자랑하는 엑스존이 대표적인 시설이다. 세계 최강 인버티드 롤러코스터 파에톤, 지상 70m 국내 최고 높이에서 추락하는 메가드롭, 국내 최대의 승몰상승각도(왕복 230도)의 토네이도, 아찔한 급류모험을 즐길 수 있는 그랜드캐니언이 포함되어있다. 이외에도 국내유일 리얼바이킹 킹바이킹과 국내 최초, 아시아 최고 높이 32m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물 폭풍 섬머린스플래쉬 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키즈테마존 위자드가든과 여름에는 인기 워터파크 ‘캘리포니아비치’도 함께 즐길 수 있다. 겨울에는 국내 최장 250m 슬로프와 스키썰매, 일반썰매, 어린이 썰매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대규모 눈썰매장을 편리하게 즐길 수 있다. 개장 30주년을 맞아 새롭게 탄생한 바자지구에서는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아름다운 분위기가 연출되어 경주월드 포토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양한 놀이기구에 놀이기구, 각종 편의시설과 음식점까지 모두 준비된 경주월드는 볼거리, 즐길 거리, 먹을거리가 삼박자를 모두 갖춰 경주 여행객들에게 나들이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자료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 korean.visitkore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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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밀레니엄파크
포석정은 왕이 술을 들면서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된 별궁의 하나였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마른 전복(포어:鮑魚)모양의 석구만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성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규모는 폭이 약 35㎝, 깊이 평균 26㎝, 전체 길이가 약 10m이다. 포석정은 중국 고대 강가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악귀를 쫓는 행사의 하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에서 유래하였다. 353년 중국의 왕희지가 쓴 난정서문(蘭亭敍文)에 보면 맑은 시냇물을 아홉 구비로 돌아 흐르게 하여 흐르는 물속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게 하되 술잔이 아홉 구비를 다 지날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술 3잔을 마시게 하였다. 이 때 술잔의 모양은 뿔모양이다.
유상곡수를 즐기는 주위는 높고 험한 산이 있고, 숲과 대나무숲이 있으며 맑은 시내가 옆으로 흘러갔다. 신라에서도 험한 남산 봉우리을 뒤로 하고 죽림과 송림이 울창하고 맑은 시내가 흐르는 계곡에 포석정을 만들었던 것이다. 원래는 남산계곡에서 흘러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 모양의 큰 돌이 있었고, 그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져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게 되었고, 삼국유사에 헌강왕이 이곳에 와서 남산 신의 춤을 따라해 어무상심무(御舞祥審舞)라는 신라춤을 만들었다 한다. 이곳은 인간의 마음을 수양하고 화랑이 정신을 도야하며 시문을 짓고 속세를 떠나 유정을 느끼던 아름다운 장소였다. 927년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며 놀고 있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붙잡히게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신라 천년 역사의 치욕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포석정이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라 왕과 귀족들의 중대한 회의 장소 또는, 제사 장소이기도 했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사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료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 korean.visitkorea.or.kr) -
안압지
월성(月城)의 북동쪽에 인접하였다. 《삼국사기》 674년(문무왕 14) 조(條)를 보면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花草)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양육하였다고 하였는데, 안압지는 바로 그때 판 못이며 임해전(臨海殿)에 딸린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 이래의 준설공사와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여 주목할 만한 유구(遺構)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동서 200m, 남북 180m의 구형(鉤形)으로 조성되었는데, 크고 작은 3개의 섬이 배치되었다.
연못 기슭과 섬에 실시된 호안공사(護岸工事)는 정교하고 도수로(導水路)와 배수로의 시설도 또한 교묘하다. 연못 바닥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와전류(瓦塼類)로서는 신라 특유의 우미(優美)한 무늬가 있는 것이 많은데, ‘儀鳳四年(679)’ 또는 ‘調露二年(680)’의 당나라 연호명(年號銘)이 있는 와전은 중요한 자료이다. 불교 예술품으로서 판상(板狀)의 금동여래삼존상(金銅如來三尊像)과 금동보살상(金銅菩薩像) 등의 우수한 작품이 있고, 유존(遺存)하는 예가 드문 목조의 배, 건축 부재, 목간(木簡) 등의 채취와 그 보존에 성공한 일은 귀중한 공적이다. (자료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 korean.visitkorea.or.kr) -
문무대왕릉
봉길리 앞바다에 육지로부터 200m쯤 떨어진 바위섬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제 30대 문무왕 (661-681)의 수중릉이다. 둘레 200m의 바위섬에 동서와 남북으로 십자 모양의 물길을 깎은 다음, 가운데 작은 못처럼 파여서 항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 깊이 3.6m, 폭 2.85m, 두께 0.9m의 큰돌을 물속 2m 깊이에 놓아 그 밑에 유골을 모신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단, 화장을 해서 재를 뿌렸느냐 유골을 직접 모셔 놓았느냐에 대해서는 아직 학자들간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 큰 돌을 대왕암이라 하며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료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 korean.visitkore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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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국보 제31호. 높이 약 9.5m. 첨성대가 위치한 곳은 옛날에는 경주부(慶州府) 남쪽 월남리(月南里)라고 하였고, 계림(鷄林)의 북방 약 150∼200m, 내물왕릉 동북방 약 300m 되는 곳이다. 이 근방을 속칭 비두골이라고도 한다.
첨성대는 『삼국유사』기이(紀異) 권2의 별기(別記)에 “이 왕대(王代)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 선덕여왕 때(재위 632∼647)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책 왕력(王曆) 제1에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이야기 끝에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에 있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현재의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 관계와 잘 부합된다. 이 기록에서 첨성대가 별명으로 점성대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자료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 korean.visitkorea.or.kr)